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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빛 세계에서 너와 노래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아, 비참한 나의 숙명이여. 부디 나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 불에 달군 쇠사슬로 묶어 사탄의 먹잇감이 되리.

 

창백하게 빛나는 보름달만이 좁은 공간에 새어 들어오는 밤이었다. 공허한 정적 사이에서 원고지를 가득 채우는 만년필의 소리만이 울렸다. 가득 찬 원고지를 속독하고, 구기고, 던지는 일만 어연 수십 번. 그의 발치에는 이제 쓰레기가 되어버린 글자 뭉치만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비참한 문장의 점철에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초안을 읽어 내린다. 눈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음울이 가득 차오르는 이야기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 아니거늘!’

 

그는 초안을 구기려다 말고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바꾸려 머리를 굴리었다. 하지만 아무리 도안을 짜내려 한들 내용은 더 비극적이었고, 우울하였고, 허무하였다. 긍정은커녕 부정의 낭떠러지와 마주한 것 같은 그의 감정에 한이 서린 한숨이 차올랐다.

 

언제부터 이런 감정이 가득하였는가?

 

언제랄 것도 없었다. 그는 늘 우울하였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이를 철저히 감추고 품위를 유지하며 이성을 늘 앞세웠다. 그녀의 곁에서만 제외하곤. 그래, 그녀가 있었을 적엔 그의 글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읽기만 해도 지식이 차오르고, 감정이 차올랐다. 이성과 감정의 조화가 담긴 그는 늘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잃지 않았고, 노을이 만연한 매일에도 태양을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태양이 떠오르고 그녀가 떠난 지금, 그의 삶은 새벽도, 저녁도 아닌 밤이었다. 달마저 태양빛을 머금지 못해 빛나지 못하는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찬연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날이 언제인가? 그는 어느 날의 고백을 회상하였다.

사실, 회상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자욱한 안개에 가려졌다.

언제부터 염세적인 생각이 뇌에 가득하였는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날은 그녀와 이별 한 이후였겠지.

책상 위에 놓인 원고지와 만년필을 거칠게 밀치자, 만년필을 놓아 둔 잉크통마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깨진 유리 사이에 검은 잉크가 흩어진 원고지에 스민다. 검게 물들어 더 이상 쓰지 못 하게 된 가여운 원고지처럼 그의 마음도 더 이상 형체를 자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검게 물들고,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걸 자각했을 때는 이미 재기불능이었다.

그는 제 발에 닿는 종이뭉치를 발로 채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창가에 다가서 달이 차오른 모습을 지켜보았다.

추잡한 글의 연쇄는 어쩌면 ‘때’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일지 모른다. 그는 깨진 유리를 원고지 위에 올려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새 잉크통을 꺼내 만년필의 잉크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제 발치에 놓인 종이뭉치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엔 끊임없이 고민해야하는 것이 원칙이거늘, 이 결단은 마치 운명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마치 그의 자서전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할 사건처럼, 그라는 존재를 정의할 마지막 퍼즐조각처럼 그로 하여금 해방감을 자아냈다. 그는 희열에 잠긴 미소를 지었다. 번뇌의 끝자락에 다가온 해방감을 만끽하며 제 손으로 문인으로서의 운명을 달리했다.

 

절필은 비관의 낙착이자 희망의 잠재이다.

 

그는 짧은 문장을 서두로 끊임없는 문장을 써내려갔다. 그가 그려낸 어떤 인물의 삶을 담은 소설이자, 자신을 담은 거울. 그는 밤낮없이 글을 써 내리고 마지막 문장으로 소설의 결말을 귀결시켰다.

 

이는 나의 자서전이니. 이름 모를 인물에게 내 이름을 선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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