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계승1순위 2021. 2. 13. 02:27

신분은 자신을 나타내는 거울이니, 절대로 위를 탐하지 말라.

상승을 갈망하며 날개를 돋아 올라간다 한들, 태양의 열기에 전부 타버릴 지어니.

분수를 깨닫고, 제 자리에 만족하며 유유자적 하여라.

 

산중에 위치한 작은 초가집 근처에서 큰 총성이 울리자, 철새 떼들이 무리지어 숲을 빠져나온다. 무리보다 뒤쳐진, 가여운 한 마리의 새는 붉은 피를 흘리며 하늘에서 떨어진다. 이것도 새들만의 신분차가 야기한 결과라면. 마고이치는 제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보이지 않지만, 명백하게 자리한 벽을 아무리 뛰어넘고, 부수려 발버둥해도 현실이, 또는 제 역량이 이를 가로막았다. 한 번 실패할 때마다 지푸라기보다 연약한 희망은 수평선 너머로 지는 태양빛처럼 사라지고, 절망은 밤을 알리는 어둠처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찾아온다. 칠흑은 유리조각이 되어 실패의 곳곳에 자리 잡고, 그것은 강렬하게 그를 자극하여 체념을 유혹한다. 눈을 감지 못한 철새의 발을 모아 한 손으로 들었다. 사체마저 이용하는 것으로 철새를 애도하는 것. 약육강식에 익숙해진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철새는 곧 새하얀 속살만 남아 부드러운 백숙이 되었다. 마고이치는 넓은 그릇에 백숙을 담아 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위로 오르다보면 보이는 낡지만, 큰 기와집. 귀족의 병약한 영애가 요양하는 곳. 신기가 강한 탓이라 근처에 간 사람들은 모두 재해를 겪는다고 하지만, 마고이치에게는 별 재해도 오지 않았던 데다 호위무사도 없이 홀로 생활하는 그녀가 걱정되어, 종종 식사와 담화거리를 챙겨 찾아가곤 했다.

큰 대문은 허름하여 쉽게 문을 열 수 있었다. 깜깜한 방들 중 유일하게 불이 밝은 곳. 그녀가 그 방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표식이 되었다. 그 방은 매번 달랐으나, 그녀가 살고 있다는 증거는 변치 않다는 것 만 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바로잡는다. 자신이 하는 일은 그저 호의에 비롯된 행위일 뿐. 이 음식에, 담화에 일말에 사심조차 품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 이것이 바로 신분 차이에 맞서 합의한 그만의 결론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린다. 티 없이 맑은 음성에 다시금 심장이 저려온다.

“들어오십시오.”

마지막 숨을 내쉬고 문을 조심스레 열자, 흰 옷을 입은 여성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분명 사심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다짐했거늘. 파도처럼 밀려오는 썩어빠진 욕망을 억제하려 비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책을 읽고 계신 건가? 참으로 부지런하구만.”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의 건너편에 앉아 백숙을 건네주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터라, 백숙에선 아직도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웃고 있었다. 저것은 곤란함을 상징하는 표정이라, 마고이치는 짐작했다. 그녀는 지나치게 순진했고, 그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리고 그녀는 늘 그에게 미안해하였고, 그는 늘 그녀에게 웃어야만 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배려였으나, 어째서인지 그녀는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 싫었던 마고이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호위와 말 상대가 되어줄 테니, 시간의 일부를 자신에게 할애해 주는 것. 그녀를 향한 작지 않은 감정이 만들어 낸 치졸한 약속이었다.

“늘 음식을 주시니, 송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두 개의 그릇을 준비하고, 두 쌍의 젓가락을 준비하였다. 식사를 하며 마고이치는 즐거웠던 이야기들을 그녀에게 전하였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표하고, 웃음 터뜨렸다. 마고이치도 호탕하게 웃으며 연신 말을 이었다. 슬픈 이야기는 없었다. 그 날의 불행은 그 시간동안 없었던 일이 되거나, 살이 붙어 행복으로 탈태되었다. 그가 제안한 시간은 저녁부터 잠들기 전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없는 것을 이용해서 제안, 어쩌면 강제일지 모를 내용이었으나 서로 만족하고 있으니, 나쁜 일은 아니라며 죄의식을 저편으로 밀어 보냈다.

“이제 자야 할 시간이 아닌가? 어서 침상에 누우라고. 나는 갈 터니.”

적당히 시간을 예상한 마고이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곧 그녀의 손길에 발이 묶였다. 그녀는 마고이치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 못하는 것이라도 있는 듯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마고이치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늘 이 시간만 되면 약속대로 헤어지고, 아쉬우면 내일을 약속했건만. 오늘따라 쉽게 손을 놓아주지 않는 그녀에게 큰 위화감이 느껴졌다.

“왜 그래? 밤이 무서운가? 귀신을 볼까 걱정되는 것이라면 함께 있어줄 수 있지만.”

그는 농담조로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본래면 “귀신은 없어요.”라며 그를 보내주던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낌새를 느끼며 그녀와 눈을 마주한다.

“그렇다고 말하면 계속 함께 있어줄 것인가요?”

그녀는 제 무게를 실어 마고이치를 이불이 깔린 곳에 눕혔다. 마고이치는 그녀의 힘에 저항할 틈도 없이 그대로 넘어졌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그의 옷깃을 손으로 잡고 움직이지 않았다. 마고이치는 그녀의 행동을 단번에 이해하였다. 서로의 감정이 통한 것. 허나, 이는 순리를 위배하는 것.

“...전부 농담이다. 지금 자지 않으면 내일 하루가 힘들 터이니 어서 자리에 누우라고?”
마고이치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가 움직이기는커녕 그를 끌어안고 움직이지 않으니, 마고이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뉘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한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람을 바보취급 하지 말아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마고이치를 바라보았다. 원망과 분노의 찬 눈빛이 그를 향하자, 심장이 가라앉는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사고는 전류가 차단 된 듯 정지되었고, 그의 의식은 그녀의 다음 말만을 잠자코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런 명령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맑은 목소리는 다양한 감정이 쌓인 돌덩이들에 가로막힌 것처럼 잠기었다. 그녀는 돌덩이들을 뱉어내기 위해 여러 번 헛기침을 하였으나, 돌은 나오기는커녕 점점 무겁게 그녀의 목을 짓눌렀다. 이내,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 마고이치를 내려다보았다. 마고이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재된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했음에도, 그는 그녀에게 질문하였다.

“그게 무슨 의미지?”

“정말 몰라서 묻는 말이에요,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체 하는 건가요?”

그녀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의 눈동자는 당혹만이 남아있었다. 그녀가 턱을 당기는 대로 입을 벌리고, 붉고 뜨거운 살덩이를 받아들이며 서로를 탐하였다. 농염한 소리가 정적을 깨우고, 서로의 눈동자에는 탐욕이 들끓었다.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였다. 그의 경험에서 밀려온 잿빛의 조각에 수없이 찔렸으나, 그 고통마저 망각할 정도의 쾌감이 들끓었다. 그녀는 그의 오비에 손을 가져다대며 입술을 떼었다. 길고, 투명한 실이 길게 이어지다 끊어진다.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짧고, 큰 고동소리가 빠르게 울리는 것을 들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목에 걸린 돌덩이는 여전하였으나, 곧 있으면 전부 언어에 녹아 사라지리라. 그녀는 그의 오비 리본을 천천히 풀며 말을 이었다.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특히 곧 가문을 이어받을 제겐 1분 1초란 한 개의 학문을 익힐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적지 않은 시간을 당신에게 쏟아 붓는 이유가 무어라 생각합니까?”

“부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말아주게.”

근심 어린 그의 어투에 몸을 다시금 일으켰다. 따스한 온기와 대조되는 차가운 눈동자가 그를 향하자, 마고이치는 그녀의 의도를 확신하고 눈을 감았다.

“전부 못들은 것으로 하겠네. 그러니, 부디.”

“마고이치,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의 기대와는 반대로, 그녀는 자신의 진심과 함께 모든 돌덩이를 털어냈다. 하지만 이제, 이보다 더 한 무게의 돌덩이가 마고이치의 전신을 짓눌렀다.

짧은 시간동안의 연애는 경험상이라고 하면 되겠으나, 그는 자신을 잘 알았다. 욕심이 가득하여 하나를 가지면 둘을, 셋을, 그리고 열을 탐하는 사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에 대해서도 깨달았다. 그녀도 자신과 같을 것이라. 그는 무거운 돌덩이를 옮기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와 나의 차이를 아는가?”

“네. 나는 귀족의 영애이나, 당신은 미천한 평민이죠.”

그녀의 말은 마고이치로 하여금 큰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심장에서 피가 솟구치는 기분에 미간을 찌푸리고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연신 질문을 잇는 그의 목소리는 돌덩이의 무게를 참지 못하고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을 텐데?”

“미천한 평민이 하늘을 탐하면 땅에 떨어져 목숨을 잃고, 귀족이 아래를 내려다보면 발을 헛디뎌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었죠?”

“잘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하는 것인가?”

그는 결국 제 감정에 못 이겨 낙루를 떨어뜨렸다. 한 줄기에 원망을, 한 줄기에 슬픔을. 한 줄기에 아픔을, 한 줄기엔 버리지 못 할 사랑을. 각기 다른 온도의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흐르자, 그녀는 혀로 그의 눈물을 닦아내었다.

“눈물이 짜다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뭐?”

그녀는 다시금 그를 눕혀 입을 맞추었다. 프렌치 키스를 잇다가, 그녀는 그와 이마를 맞대고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그 곳에 있다면, 지옥마저 천국이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 아닙니까?”

말을 마친 그녀의 볼이 붉었다. 그는 처참히 무너진 제 정의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모두를 위한 정의라 믿었거늘, 자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감정의 노예임을 뼛속 깊숙이 되새겼다. 이 한 마디에 무거운 돌덩이가 정의와 함께 사라지니, 순리를 이탈하는 것과 무어가 다른가?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절제가 흔적도 없이 무너진 결과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정말, 못 말리는 아가씨라니까.”

그가 다시금 지은 미소에 그녀도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가 사랑하던 티 없이 맑은 소리였다. 둘은 조용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행복 사이에 불현 듯 밀려오는 불안과 걱정을 그는 애써 무시하였다. 곧, 그녀는 정적을 깨고 그에게 말했다.

“마고이치, 저는 내일 본가에 돌아갈 거예요.”

“마음만 고하고 떠나겠다는 건가?”

그의 말투에 아쉬움이 묻자, 그녀가 짧은 사이 간 변했다며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고이치도 함께 돌아가, 저만의 호위무사가 되어주십시오.”

그녀의 제안에 그의 표정은 점점 굳었다. 제 신력으로 인해 호위무사가 여태 없었으니, 유일무이한 호위무사이자 연인이 되어달라는 것이 그녀의 제안이었다.

“이 부분은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될까?”

“직위를 이용해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생각할 권리마저 박탈하는 한 마디에, 마고이치는 “내가졌다.”며 제 머리를 쥐어 싸맸다. 독거중인 터라 현재 살고 있는 곳에 별 다른 미련도 없었던 그였으나, 그녀의 부하로 들어가는 주제에 연인이라니. 참담한 미래가 훤했기 때문이다.

“저는 제 손으로 지옥을 가는 것을 선택했는데,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지옥도 천국처럼 살아갈 자신감은 없나 봐요?”

“그럴 리가 없지 않겠나?”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렸다. 뭐하는 짓이냐며 그의 손을 뿌리치며 화내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열기를 품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 목숨을 다 해 지켜드리죠.”

그의 대답에 그녀는 그의 등에 팔을 두르며 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