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빛 세계에서 너와 노래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왕위계승1순위 2021. 2. 13. 02:25

왜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할 때마다 미련이 생기는가? 펜을 내려놓으려 할 적마다 만년필을 선물 받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 글을 마지막이라 생각할 적마다 새로운 소재가 뇌리를 스치는 것이며, 삶에 대한 모든 것을 두고 떠나려 할 적마다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일까.

대체 왜.

아쿠타가와는 신문을 덮어버리곤 창밖을 내다보았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거리는 점멸되는 불빛에 화려하였으나, 그의 시선엔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초여름의 바람도 그의 피부엔 매서운 겨울바람 같았다. 그래, 그에게는 모든 것이 겨울이었다. 마음 한 곳을 허전하게 하는 겨울의 향연을 반기고, 수개월을 함께한 연약한 이파리의 죽음을 목격한 나무들이 나뭇가지를 드러낸 형태가 익숙한, 우울한 감정이 계절 하나만으로 용인되는 겨울이었다. 다른 계절이 낯설어 겨울만을 기다렸다. 겨울만은 그를 온전히 받아들여주었다. 어쩌면 이것도 그의 착각일지도 모를 테지만.

화려한 거리에 나서니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눈에 보였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가족과 서로를 끌어안는 연인. 그 사이를 거닐며 아쿠타가와는 소외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계절에 적응하기 위해서라지만 나오는 게 아니었어. 심장을 파고드는 바람이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내쉬는 숨결에 하얗게 입김이 나오는 것만 같았고, 얇아진 옷은 찬바람을 막지 못해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아, 그냥 대충 먹거리만 사고 돌아가자. 그가 식자재를 사는 것으로 목적을 바꾸고 발길을 돌리니,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아쿠타가와 씨!”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심장의 박동을 자각한다. 그의 사랑, 그의 염원.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그녀는 낭떠러지에 서있는 그의 미련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그를 반기며 다가오지만, 그는 온전히 맞이할 수 없었다. 잠식되었던 욕망이 수면 위로 올라와 그를 엄습하였다. 탐욕이 목을 죄고, 손길이 저절로 그녀를 향해 뻗어나간다.

닿고 싶다. 그는 불온한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뻗어나간 손은 갈 길을 잃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불안에 젖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어보였다. 억지로 끌어올린 미소가 역했다. 바싹 마른 입술을 간신히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는 데 수 초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무녀 군이 아닌가? 머리카락에 먼지가 묻어 잠깐 실례했네.”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황급히 머리카락을 다듬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머지않아 사라질 그의 파란 나비. 이(異)세계에 온 이상 이별은 필연이었다. 그녀는 곧 이 나라를 뜨고 여행을 하다, 태양이 뜨면 밀려오는 여명과 함께 기약 없는 작별을 할 것이다. 그녀와 그에게 이질적인 존재임을 알지만, 이는 그로 하여금 더 큰 욕망을 자극하였다.

그는 여전히 신사적인-그녀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하지만 그는 신사라는 단어를 명백히 정의하지 못하였으며, 그 단어가 자신의 격에 맞지 않음을 은연중에 느꼈다.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가식적인 미소. 그녀에게 영영 보여주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건만. 허나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깊숙이 숨겨둔 어둠이 자신을 집어삼킬까봐, 그리고 그것이 그토록 사랑하는 이에게 큰 해가 되고, 멀어지고 모호한 관계에서 모든 것이 끝나버릴까. 억지로라도 웃으면 두려움이 줄어들까 표정을 과장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두려움 한 층 더 커졌고 생각하는 방법을 까먹은 것처럼 멍하니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였다.

“아쿠타가와 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나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그녀가 그를 올려보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그는 그제서야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였다. 할 말은 모두 악마가 가져갔다고 하면, 그녀가 과연 믿어줄까? 그에게 남은 언어라곤 음지에서도 등한시하는 추악한 언어뿐이라고 하면 그녀는 그를 경멸할까? 그녀에게 외면 받는 잠시간을 상상하자, 마치 구원에서 제외된 신도처럼 저주받은 공간에 버려져 온 몸을 꿰뚫는 추위에 공포를 마주하고, 위협과 절망에 주저앉는 자신이 눈에 보였다. 그녀를 잃은 자신은 그래, 신에게 버림받은 추종자. 더럽혀진 추앙이 들통 나고 만인의 질타와 혐오의 시선 아래서 심리적 처형을 당한 비운의-비운보다는 행위의 대가라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신자. 아, 태양에게 버림받은 그는, 전등의 불빛을 태양이라 착각하고 날아오르다 타버린 날개를 바라보며 추락하는 나방과 다른 바가 무엇인가? 그는 나방이고, 그녀는 푸른 나비이니, 그녀는 한날 호접몽에 지나지 못하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함께 산보라도 걷는 것이 어떠한가?”

그는 그녀에게 손을 건네었고, 그녀는 맞잡았다. 그녀의 체온이 전해지자 온 몸에 전율이 흐르고 그녀를 향한 짙은 탐욕이 한 층 짙어졌다. 안 돼, 이것이 밖으로 드러나면.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걸음걸이에 맞추며 자신을 세뇌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은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죄스러운 감정을 상자에 집어넣고 마음 속 어딘가로 밀어 넣었다. 밝은 햇살에서 반짝여야하는 그녀가 노을빛 아래서 간신히 숨통을 이어간다. 그녀를 옭아매고 생명을 갉아먹는 것은 식신이 아니라, 그녀가 이 곳에서 저와 함께하길 바라고, 어떻게든 붙잡으려 하는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자괴감에 머리가 핑 돌았다. 욱신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녀로 하여금 식신보다 악랄한 존재였던가? 욕심에 눈이 멀어 연정하는 이를 나락까지 몰고 가려 했단 말인가? 그의 호흡은 점점 빨라지고 이내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그녀가 걱정할 텐데.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지고, 흐려지는 시야에 그는 다시금 사색에 젖는다. 그녀와 함께한 며칠 간 이성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음탕함에 모멸감을 느껴 자취를 감춘 것인가, 아니면 글에 모두 소모하여 형질을 잃은 것인가? 사색이 즐비해야 하는 뇌는 그녀만이 가득 찼고, 음탕한 성정이 지배하고 있으니. 이성이 들어올 자리는 상실한 것인가?

그는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감추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내 환희가 가득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혐오에 비롯한 웃음이었다. 고통에 주저앉던 그가 갑자기 호탕하게 웃으니, 그녀는 그를 따라 앉다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쿠타가와 씨,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그는 그녀의 말에 곧장 답장을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웃으니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그는 그것을 닦으면서도 웃음을 연신 이었다. 그래, 그녀를 향한 사랑에 이 감정들을 모두 지우고 아름다운, 순백의 찬란한 감정만을 남겨야 하건만. 그녀를 향한 숭배, 사랑. 고결함을 유지하며 때 묻지 않은 손만을 내밀고, 경외어린 언어만 사용해야 하거늘. 어찌 금지된 문 뒤에만 남겨둬야 하는 문장들이 맴도는 것인가? 납득할 수 없는 걸악한 정염이여. 끝내 부인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이자 정신이여. 부디 거룩한 그녀의 앞에서 승화되고, 성스러운 빛을 마주한 악마처럼 처참하게 타버려 영영 닿지 않기를.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네. 단지 새로운 소설의 영감이 떠올랐을 뿐이야.”

다시 길을 걸을까? 그의 궐기에 그녀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이내 그는 손을 털고,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그 손을 잡았다. 둘은 같은 보폭으로 화려한 거리를 걸었다.

그들은 담화로 서로를 이해하였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존경과 혐오. 미추선악. 그녀는 모든 것을 말했지만 그는 곳곳에 거짓말을 넣어 진실을 감추었다. 그것이 금지의 문에서 그녀를 멀리하는 최대한의 방법이었다. 부디 나를 용서해줘, 이 호접몽에서 깨어나기 싫은 사내의 갈망을. 파란 나비를 잡지 않을 터이니 부디 눈에 오래간 담고, 꿈이어도 좋으니 이 시간이 영원히 이어가게 해줘.

그녀의 손을 잡은 그의 힘이 한 층 강해진다.